손끝으로 배우던 소리 없는 언어, 신입 간호사의 서툰 수어 도전과 소통의 본질
대학병원 신입 시절,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환자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수어를 배우겠다고 발버둥 쳤던 제 옛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습니다. 서툴지만 치열했던 그 시절의 순수함이 가만히 덮어두었던 마음속 깊은 곳을 툭 건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게 서툴고 고단했던 신입 간호사 시절, 병원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2층에 조그만 수어 교육원이 유일하게 딱 하나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병동에서 귀가 안 들리거나 말을 못 하는 환자분들을 만나게 되면 손발이라도 되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 하나로 쥐꼬리만 한 월급을 쪼개 가며, 일주일에 두 번씩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수어 교육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 낯선 손짓들을 잘 배워두면 언젠가 간호 현장에서 정말 요긴하게 쓰이겠지 하는 나름의 부푼 기대감을 안고서 말이지요.
하지만 막상 가보니 현실은 제 생각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맨날 손가락으로 숫자 가리키는 법만 지루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한글 자음, 모음을 손가락 모양으로 하나씩 따라 하는 '지문자' 단계를 몇 주째 붙잡고 있으니, 마음만 앞섰던 저로서는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언제 진짜 단어를 만들고 대화를 해보나 싶어 답답한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매일 숫자랑 자모음만 익히다 수업이 끝나버리니, 이건 내가 원하던 수어가 아니라는 생각에 힘이 쭉 빠지곤 했습니다. 게다가 일주일에 고작 두 번 강의를 듣는 걸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임상 현장에서 당장 수어를 쓸 일도 없다 보니 정성껏 익힌 손짓들은 뒤돌아서면 금세 가물가물해지며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큰 기대를 품고 찾아간 강의실이었지만 수업은 생각보다 활기가 없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진도는 더뎠고, 배울수록 가슴 한구석이 막막해졌습니다. 어떻게든 끈기를 가지고 버텨보려 했지만, 3교대로 밤낮없이 돌아가는 병원 근무 시간은 야속하게도 학원 시간과 자꾸만 꼬이고 어긋났습니다. 피로가 머리끝까지 쌓여가는 현실의 벽 앞에서, 결국 6개월 만에 수어 교육원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제 서툰 손짓들은 차가운 병동 한편에서 피어나지도 못한 채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 두꺼운 수어 책은 고스란히 서랍 깊숙이 처박혔고, 제 기억 속에는 참 아쉽고도 서글픈 미련으로 남았습니다.
진짜 소통은 요란한 말솜씨나 거창한 다짐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상대를 온전하게 마주 보고 귀를 기울이려는 작은 끈기 하나면 충분하다는 걸 환자들과 소통하는 내내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대한민국 '한국수화언어법(한국수어법) 제16조'와 '장애인복지법 제35조의2'에 따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청각장애인이 공공시설을 이용하거나 행정·사법 절차를 밟을 때, 그리고 일상생활을 할 때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수어 통역사 배치와 관련 서비스를 정당하게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의료 및 공공 치안망의 최전선에서 발생하는 언어 장벽은 단순한 소통의 불편을 넘어, 환자의 생명권과 안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와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행정 편의적인 서식에만 매몰되지 않고, 정보 사각지대에 놓인 약자들의 온전한 의사소통 권리를 보장하는 따뜻한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비록 제 6개월의 짧은 수어 도전은 아쉽게 서랍 속에 묻히고 말았지만, 누군가의 따뜻한 버팀목이 되고 싶어서 밤마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학원으로 향했던 그 시절의 기억만큼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매서운 임상 현장의 공기를 버텨내며, 소리 없는 눈짓과 손짓에 귀를 기울이려 애썼던 제 신입 시절의 순수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눈앞의 얄팍한 요령이나 편법에 흔들리지 않고, 제 진심을 담아 정직하게 이 블로그 공간의 가치를 책임져 나가겠습니다.
세상의 냉혹한 시선 앞에 부딪혀 홀로 고단한 싸움을 벌이고 계실 선량한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말과 소리 대신 다정한 눈빛으로 서로의 빈자리를 따뜻하게 채워갔던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당장 눈앞의 노력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로 조급해하거나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온 마음을 다해 눈을 맞추며 정성을 쏟아부은 진짜 마음은, 결국 차가운 장벽을 허물고 온전하게 통하는 법이니까요. 황글라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