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풍속 60m의 폭풍우가 몰고 온 공포와 대학병원의 비상 정전 사태
태풍 매미의 칠흑 같은 암흑 속, 대학병원을 사수했던 간호사들의 밤샘 사투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대자연의 거대한 역습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평온하던 일상을 한순간에 마비시키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참혹한 재난을 직접 마주할 때가 그렇습니다. 제 임상 경력을 통틀어 가장 치열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2003년 9월의 태풍 '매미' 당시의 서늘했던 공기가 기억 속에서 문득 떠오릅니다.
당시 기상 관측 사상 전무후무한 최대 순간풍속 초속 60미터라는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며 전국의 거리마다 전봇대들이 낙엽처럼 고꾸라지고 아름드리나무들이 무참히 꺾여 나갔었지요. 지대가 낮은 구역은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해 차량들이 잠겨버렸고, 전국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남긴 밤이었습니다. 하필 그 사나운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했던 날 밤, 제가 근무하던 대학병원 내부 역시 예외 없이 전력망이 완전히 차단되는 초유의 비상 정전 사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온 건물의 불이 순식간에 다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는데, 그 순간 밀려온 서늘한 공기는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만큼 매서웠습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전력 공급이 마비되면 중환자실의 인공호흡기와 산소공급장치가 멈추고, 응급실과 수술실의 생명 신호 모니터가 전부 꺼져버리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3교대 나이트 근무의 최전선에서 사방이 컴컴하게 변해버렸을 때 밀려온 긴장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재난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 한들, 위기 상황에서 고령층 어르신들이나 거동이 불편한 환자분들처럼 신속하게 움직이기 힘든 이들을 먼저 살피는 것은 결국 현장 실무자들의 몫입니다. 서류상의 규칙이나 복잡한 행정 절차보다, 위기의 순간에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며 빈틈없이 호흡을 맞추는 의료진들의 연대만이 환자들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우리 병원의 간호사들과 현장 실무자들은 오직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단 한 순간의 지체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전산이 마비되어 펜을 들고 수기 차트를 대조해가며, 손전등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환자들의 숨통을 붙잡기 위해 컴컴한 복도와 병동을 쉴 새 없이 숨 가쁘게 오갔습니다. 비상 자가발전기가 안정적으로 돌아갈 때까지 환자들의 생명 수치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이 거대한 정전 위기를 버텨낸 덕분에, 단 한 명의 환자도 잃지 않고 무사히 그 밤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병원의 거대하고 정형화된 건물 너머에는 이렇듯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도 수기 차트를 대조하며 묵묵히 환자의 숨결을 지켜냈던 실무자들의 정직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현장과 동떨어진 시스템의 규칙보다, 오직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움직였기에 그 가혹했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제34조에 따르면, 재난관리책임기관의 장은 재난관리를 위하여 필요한 물품, 재산 및 인력 등의 물적·인적자원인 재난관리자원을 비축하거나 지정하는 등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여야 할 법적 의무를 집니다. 또한 의료법과 관련 지침에 명시된 기준에 따라, 갑작스러운 정전이 발생하더라도 인공호흡기 같은 생명 유지 장치에 예비 전력을 즉각 공급하는 무정전 전원장치를 상시 점검하고 작동시키는 것은 타협할 수 없는 필수적인 지침입니다. 시스템이 내세오는 지표보다 재난 최전선에서 철저하게 원칙을 지키며 땀 흘리는 실무자들의 유기적인 연대야말로, 우리 공공 안전망을 보호하는 가장 단단한 최후의 보루입니다.
어둠 속 병원을 지켜내기 위해 밤을 지새우던 우리 의료진들의 발자취는 가슴 깊이 큰 자부심으로 와닿아 있습니다. 진짜 건강한 공동체라면 눈앞의 성과만 앞세울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최전선에서 밤을 지새우며 현장을 수호하는 실무자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예우해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냉혹한 시선과 시련 앞에 부딪혀 홀로 고단한 싸움을 벌이고 계실 선량한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당장 눈앞의 노력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로 조급해하거나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서로를 믿고 환자의 생명선을 끝끝내 사수해 냈던 진짜 진심은, 결국 차가운 장벽을 허물고 온전하게 통하는 법이니까요. 황글라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