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지나 홀로 가꾸어 나가는 단단한 삶의 궤적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답답하고 그럴 때면 누구나 한번 점을 보고 싶어 하지요. 돌이켜보면 과거 결혼 전, 상대방과의 사주나 궁합이 좋다는 점쟁이의 말만 믿고 시작했던 선택이 그랬습니다.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해야 했던 제게는 서글픈 마음조차 사치였으며, 그렇게 등 떠밀리듯 시작했던 결혼 생활은 매일이 숨 막히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결혼을 마음먹은 대로 내 나이 이십대 중반에 했습니다.

남편과 나는 직장 선배로부터 알게 되었지만,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만나지 않으려고 전화도 피하고 집에 찾아와도 피하고 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막창집에서 막창과 맥주를 마셨습니다. 계산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전화번호를 찾다가 생각이 나는 사람이라곤 남편 전화번호였습니다. 남편은 계산을 하러 왔습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남편과 나는 다른 맥주 집으로 가서 한잔을 더 하기로 했습니다.

그날이 문제였습니다. 나는 술기운에 남자에게 '우리 결혼하자' 하고 그냥 툭 던진 말을 그 다음 날 남편이 나에게 통보를 했습니다. 본가에 나랑 결혼을 알린 것입니다.


주말에 인사를 하러 간 이후 번갯불에 콩 볶듯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으나 시집에서 웨딩드레스 촬영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신혼여행 역시도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날짜를 여자 쪽에서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시어른이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왠지 이 결혼은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남자한테 시집을 가기엔 이건 잘못된 만남이란 걸 느끼게 되었고 과연 이 남자가 나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였습니다.

나는 집에서 말도 못 하고 이 서글픈 결혼을 해야 하는 것에 침대에서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 말 한번 잘못한 게 이렇게 결혼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펑펑 울고 있을 때 나와 결혼할 사람이 왔습니다. 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남자도 아는 듯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나는 "우리 결혼하지 말자" 이 결혼은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말을 하였으나 남자는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약속이 된 날짜에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친정아버지께서 웨딩 촬영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썩 내키지 않는 결혼을 시어른이 잡은 날짜에 무사히 마쳤습니다.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결혼식을 마치면 신혼여행을 가야 하는데 도대체 이 차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남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시어른께서 시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신혼여행을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화가 나려고 했지만 참아야 했고 그날은 시집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신 분들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한복을 입고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가 너무 곤욕스러웠습니다. 이로 인해 그 다음 날 신혼여행을 가긴 했지만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2박 3일의 신혼여행 여정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습니다. 먼저 시집에 가서 하룻밤을 먼저 자고 그 다음 친정집으로 갔습니다. 모든 우선이 시집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른들께 인사를 다 하고 신혼집으로 갔으나 집 또한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래저래 결혼 생활이 이어졌고, 아이도 낳았지만 우리는 역시 잘못된 만남인지 경제적으로 나아지지가 않았습니다. 말이 대학병원이지 월급은 박봉이었던 데다 남편의 월급은 알 수 없었습니다. 결혼생활 내내 나에게 생활비 한 번 주지 않았으니까요. 아이가 크고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한참 사춘기였습니다. 어느 날은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고 혼자 큰 고심을 안은 채 책상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예감에 "아들, 오늘 학교 안 갔어?"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고, 아들은 몇 분 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키더니 겨우 제게 말을 꺼내더군요. 조금 있으면 학교폭력대책위원회(학폭위)가 열릴 예정이라고요. 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우선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차분하게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 생각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어느 여학생이 있는데, 그 아이가 아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혀왔다는 거였습니다.

내가 평상시에 항상 아들에게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야 하고, 절대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쳤던 그 정직한 훈육이, 도리어 아이의 손발을 묶어 무기력한 피해자로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가슴이 참혹하게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곧바로 직장에 근무 일정 변경을 신청하여 급한 불을 끄고는, 다음 날 아들이 다니는 중학교로 단숨에 찾아갔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그 여학생을 직접 마주하여 현장의 실태와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내었습니다. 아들의 억울함을 온전히 규명한 끝에, 불합리하게 흘러가던 학폭위 절차를 바로잡고 그 여학생을 다른 반으로 이동시키도록 조치를 해 달라고 요구하여 끝내 해결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결심을 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에게 사춘기 때만이라도 뒤를 보살펴줘야겠다고, 그래서 남편에게 아이가 사춘기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뒤를 보살펴주게 한 달에 150만 원만 지원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우리 안 되겠다 이혼하자"였습니다. 기가 막혀서 내가 남의 새끼를 돌보자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 아이를 돌보겠다는데 돌아온 화살이 이혼이었습니다.

역시 결혼 전의 내 생각이 맞았던 것입니다. 저 남자는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도 나에게 돈을 주기 싫었나! 그럼 결혼은 왜 했대! 우린 잘못된 만남이라 결국은 이혼을 하게 되었고 아이와 나는 내가 어떻게든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양육비도 통장에 넣어주기로 했는데 단 1원도 오지를 않았습니다. 지켜주지도 못할 거면서 술기운에 결혼을 하자고 했다고 그 다음 날 시댁에 결혼을 하겠다고 통보는 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배포도 없고 경제적이든 무엇이든 모두 형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양보하는 것도 그렇고 역시 우린 잘못된 만남이었던 것이 분명해졌다는 것입니다.


민법이 정해놓은 숙려기간을 거치고 자녀의 친권과 양육 책임을 부모에게 묻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도 현실의 매서운 바람은 참 무정하게만 흘러갔습니다. 약속된 양육비는 법이 무색하게 단 1원도 송금되지 않았고 모든 짐은 온전히 제 몫으로 남겨졌으니까요. 척박한 현실 속에서 저를 버티게 하고 끝내 일으켜 세운 건 마법 같은 요행이 아니라, 엄마의 새 인생을 응원해 주던 대견한 아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병원에서 밤을 새우며 버텨냈던 책임감이었습니다.

비록 첫 단추는 잘못 끼워진 만남이었고 홀로 서야 하는 길은 고단했을지언정, 이제는 내 아이와 함께 정직한 땀방울로 저만의 단단한 인생을 꿋꿋하게 재건해 나갈 것입니다. 지금까지 방구석에서 삶의 자취를 따뜻하고 정직한 시선으로 사색하는 황글라라였습니다.